Excerpt for THE LAST TESTIMONY by dojong kim, available in its entirety at Smashwords

THE LAST TESTIMONY – Smashwords E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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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89-964800-0-6 03810





















최후의 증언


목차


1. 이중공원(二中公園)


2. 겨울 광시곡(狂詩曲)


3. 비련(悲戀)


4. 이월동화(移越同化)


5. 그해, 도쿄의 마지막 밤


6. 잊혀진 사건의 序幕


7. 산 者와 죽은 者


8. 추적(追跡)


9. 공조수사


10. 숨은 꽃들이 피어날 때


11. 최후의 증언(證言)




1. 이중공원(二中公園)



도쿄 나리타(成田)행 대한항공 KE715 비행기 한 대가 기체를 움직이고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 기내 스피커를 타고 안내방송이 흘러나오자 스튜어디스 둘이 통로에 서서 비상시 대피 요령을 설명하고 있었다. 승객들 중에는 혼자 비행기에 탄 앳된 얼굴의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눈에 띄는 예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마는 알맞게 둥글고, 이마를 균형 있게 받치고 있는 두 눈썹은 정갈했다. 콧날은 다소 거만한 듯 보이지만 도톰하고 귀염성 있는 입술이 그 거만함을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외모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소녀의 두 눈빛이었다. 그녀의 두 눈은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한 눈에 꿰뚫어보는 듯이 짙고 검었고 총기가 있어 초롱초롱 빛났다. 그러나 그런 반면 그 눈빛 속엔 정확히 뭔지 모를 우수가 한껏 깃들어 있었다.


소녀는 불우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녀의 올해 나이는 열일곱 살로 그녀의 어머니는 이년 전에 유방암으로 운명을 달리했다. 소녀의 어머니의 죽음은 그녀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던 사람이었다. 의사에게 울며불며 매달렸지만 결국 그녀의 어머니는 죽음을 비켜가지 못했다. 젖가슴 한 쪽을 완전히 도려내는 대수술을 받았지만 암세포가 너무 번져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그런데 소녀의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죽은 지 불과 3개월도 채 안 되어 그녀의 아버지는 계모를 집안으로 들였다. 그녀의 계모는 미용사 출신에 자상하지 못하고 직선적인 성격이었다. 소녀는 어머니가 죽은 지 채 3개월도 안 돼 계모를 집안에 들인 아버지를 원망했다. 사춘기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시련이자 가혹한 것이었다. 집안에 계모가 들어오고부터 소녀는 말수가 없어졌다. 그리고 계모와는 의견 충돌이 잦았다. 계모의 질시와 따돌림을 받고 있던 소녀에게 불행은 계속됐다. 계모가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아기를 가진 것이다. 소녀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다. 계모도 죽이고 계모의 뱃속의 태아도 죽이고 싶었다. 계모가 아기를 출산하자 그때부터 계모는 소녀를 더욱 심하게 구박했고 심지어는 폭력까지 행사했다. 게다가 더욱 원통한 것은 아버지의 태도였다. 그는 계모에게 두들겨 맞는 딸자식을 마치 남처럼 대했다. 그는 철저한 타인이었다. 계모로부터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욕지거리가 나올 때에도 아버지는 계모의 눈치만 보면서 슬그머니 방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딸자식이 맞아 죽든 병신이 되든 상관없었다.


비행기가 나리타공항에 도착한 것은 김포공항을 출발해 김해공항을 경유한 지 한 시간이 채 안 된 시각이었다. 소녀는 탑승객들에 섞여 나리타공항에서 입국 심사를 받은 후 짐을 찾아들고 공항 대합실로 나왔다. 대합실을 나온 소녀는 눈동자를 바삐 굴렸다. 어디에 계실까. 그녀는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를 찾고 있었다. 그 동안 소녀는 자신의 친할머니가 일본에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할머니 얘기를 접한 건 불과 몇 개월 전 일이었다. 대설 주의보가 있던 날이다. 한통의 전보가 집으로 날아왔다. 소녀가 집에 혼자 있을 때였다. 소녀는 전보의 내용을 살펴보았지만 수신자 주소만 빼놓고는 전부 일본어로 씌어져 있어서 무슨 내용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평생 처음 알게 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부고장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일본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아버지는 왜 말하지 않았을까. 죽은 어머니 역시 왜 그런 중요한 사실을 말하지 않았던 것일까. 소녀의 아버지가 가족 이야기를 해 준적은 거의 없었다. 친척들이 다 죽었다면 제사라도 지내야할 테지만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 일도, 제사를 지내러 친척집에 가는 일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이상하기는 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만 나오면 번번이 역정부터 내면서 다음부터는 입 밖에도 꺼내지 말라고 했다. 그런 아버지의 태도를 소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소녀가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 사이에 좋지 않은 일이 있었을 게 분명하다는 것밖엔.


할아버지의 부고장이 날아든 날 새벽이었다. 소녀는 계모와 아버지 사이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대화의 요지는 자신을 일본 할머니 댁에 맡기자는 것이었다. 계모에게 흠뻑 빠져있던 아버지였다. 소녀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딸이 어리다는 이유로 반대를 했지만 결국 계모의 주장에 동조하고 말았다. 소녀는‘도움도 안 돼는 딸년 제발 싸고돌지 마요.’ 하는 계모의 칼날같이 날카로운 말에 울컥 터져 나오는 눈물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 못난 아버지, 지지리도 못난 우리 아버지…… 소녀는 이불을 덮어쓰고 턱을 덜덜 떨며 억울해서 울었다. 언젠가는 계모에게 처절하게 복수할 거라고 이를 악물면서.


그런 일이 있은 후에 계모는 소녀를 일본으로 하루라도 빨리 출국시키기 위해 분주히 쏘다녔다. 소녀의 아버지 역시 계모를 거들었다. 두 사람의 호흡은 신기할 정도로 착착 들어맞았다. 소녀를 일본에 보내기로 결정한 후 한 달가량 지났을 땐 결국 소녀는 낯선 나라로 내몰려야만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소녀의 아버지는 출국 전에 사진 한 장을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빛바랜 할머니의 흑백사진이었다. 사진은 색이 바랜 나머지 쩍쩍 갈라져 금방이라도 찢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소녀는 사진을 들고 할머니를 찾아 대합실을 한참동안 돌아다녔지만 할머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리타공항은 사람들로 북적댔다. 처음 와보는 일본이지만 외모가 비슷한 일본인들인지라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거기 공항 대합실에서 기다리면 네 할머니가 널 데리러 나오실 거야.”


분명히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었다. 공항에 도착한 후 벌써 한 시간이 넘었지만 할머니가 나타나지 않자 소녀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닐까. 대합실 벤치에 앉아서 할머니를 볼 때마다 몇 번을 일어섰는지 몰랐다. 더구나 일본어를 단 한마디도 할 줄 몰랐던 그녀 였기에 정말 난감한 노릇이었다. 소녀의 손바닥에 땀이 베어나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지금 네가 들고 있는 사진보다는 훨씬 늙으셔서 어쩌면 널 못 보실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네가 할머닐 못 알아볼 수도 있으실 게야. 혹시 모르니까, 이 주소를 가지고 가. 이건 할머니 주소다. 사람들에게 이 주소를 내밀면 가르쳐 줄 거야.”


소녀의 아버지가 한말을 떠올린 소녀는 할머니의 주소를 적은 메모지를 꺼내보았다. 전화번호라도 적혀 있으면 좋을 것을. 그녀의 아버지가 건넨 메모지에는 주소만 달랑 적혀 있었다. 불안하고 초조해진 소녀는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만일 할머니를 만나 지 못한다면 혼자서 할머니 댁을 찾아가야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말도 통하지 않고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찾아간단 말인가? 지금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무작정 할머니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엔…….


그로부터 삼십 분이 지났다. 소녀는 손목시계를 습관처럼 내려다보았다. 기다리면서 별의별 생각이 다 났다. 계모와 아버지가 날 떼어놓으려고 일부러 일본에 보낸 게 틀림없어. 처음부터 할머니가 아버지의 연락을 받지 못했을 수도 있을 거야. 소녀는 커다란 여행용 가방의 손잡이를 꽉 붙잡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팔을 길게 뻗은 채 여행용 가방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불안해보였다. 그리고 소녀는 이젠 완전히 울상이 된 표정으로 입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소녀가 앉은 벤치 옆자리로 벌써 세 사람이나 앉았다가 가버렸다. 그런데 그녀 옆으로 한 일본인 청년이 다가와서 앉았다. 사실 그는 진작부터 대합실 스낵코너에서 콜라를 들이키며 소녀를 쭉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 마른 몸의 일본 남자는 짙은 눈썹에 갸름한 얼굴, 피부가 흰 미남자였다. 낯선 사람이 그녀 옆 자리에 앉자 소녀는 잡고 있던 여행용가방을 바짝 끌어당겼다.


오하이요.”


낯선 청년이 웃으면서 인사를 하자 소녀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잠깐이지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지만 소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가방을 꽉 붙잡고 있는 자신의 행동이 너무 부자연스럽게 느껴져서 가방에서 손을 뗐다. 대신 소녀는 자신의 여행용 가방에 발끝이 닿을 수 있게 다리를 약간 앞으로 뻗었다. 그런 소녀의 모습을 보고 낯선 청년은 미소를 지었다.


낯선 청년은 가끔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걸어갔다. 소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낯선 청년이 걸어간 곳은 공항 출구 쪽이었다. 그곳으로 간 청년은 출구를 빠져 나오고 있는 사람들 중 자신이 찾고 있는 사람을 발견한 듯 바리케이드를 짚으며 훌쩍 뛰어넘었다. 날렵한 몸놀림이어서 아마도 그가 운동을 많이 한 사람이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그런 한편, 그가 마중 나온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가 만난 사람은 미모의 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검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었고 머리칼은 보기 드물게 등허리까지 길게 길러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햅번이 썼던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이국적이었다. 청년은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힘껏 껴안으며 다정하게 키스를 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소녀는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소녀는 두 사람 사이가 연인 사이일 거라고 쉽게 짐작했다.


청년이 만난 미모의 여인에게는 동행인이 있었는데 그녀의 동행인은 단단한 체구에 짧은 스포츠형 헤어스타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국적인 외모의 여인과 마찬가지로 검은 선글라스를 꼈고 검은 정장 차림이었다. 그녀의 동행인은 두 사람이 키스를 나누는 사이에 주위를 휙휙 돌아보곤 했다.


이윽고 청년과 이국적인 외모의 여인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대합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여자는 하얀 이가 드러나도록 활짝 웃고 있었고 검은 정장차림의 동행인은 캐리어를 밀고 두 사람을 뒤따르고 있었다. 소녀는 청년과 여자가 자기 곁을 지날 때 얼른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리고 그들이 완전히 지나갔다고 생각했을 때 고개를 들어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소녀는 공항 밖으로 눈길을 던졌다. 소녀는 호기심 반 관심 반으로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공항 밖으로 나갔을 때 거기엔 또 다른 그들의 일행이 있었다. 대합실 출구 쪽 도로에는 한국에선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검은색의 육중한 리무진 한 대가 멈춰 서 있었고, 캡을 쓴 운전사가 두 사람이 다가오자 허리를 구십 도로 꺾고 인사를 하며 급히 리무진의 도어를 여는 것이었다. 청년과 여자가 리무진에 오르자 운전사는 도어를 닫았고, 캐리어를 끌고 가던 검은 정장차림의 동행인을 도와 트렁크에 짐을 실은 후에 리무진의 도어를 모두 쾅쾅 소리가 나게 닫고 있었다.


저런 으리으리한 차를 타는 사람이라면 정말 부자겠지? 뭐 하는 사람들일까…….’


그런데 차가 막 출발할 때였다. 갑자기 리무진의 도어가 열리면서 청년이 급하게 내렸다. 그는 대합실로 다시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소녀는 깜짝 놀라 고개를 다시 숙여버렸다. 화장실에 가는 것이리라. 소녀는 그가 차에서 급히 내린 이유를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청년이 잰걸음으로 걸어오고 있는 방향은 그녀가 앉아 있는 곳이었다.


"제히렌락꾸시테쿠다사이(꼭 연락해 주십시오)!”


청년은 이상한 일본말을 하면서 소녀에게 명함을 건넸다. 소녀는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그의 말뜻엔 뭔가 간절함이 배어 있다 느낄 수 있었다. 소녀에게 명함을 남긴 청년은 다시 공항 밖으로 달려가 리무진에 올랐고 곧바로 검은 색 리무진은 소녀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소녀는 리무진이 떠나고 없는 빈자리를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청년이다……하지만 그를 떠나보내고 나니 뭔지 모를 미련과 허전함이 남았다. 그리고 또 다시 지루한 기다림이 이어졌다. 이제 소녀에게 남은 것은 상실감과 상처뿐이었다.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어떻게……. 소녀는 내키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집에 전화를 걸어 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무거운 여행용 가방을 끌고 공중전화 부스를 찾았다. 하지만 집엔 아무도 없었다. 수차례 반복해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발신음만 계속 울려대고 있을 뿐 전화를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양어깨를 축 늘어뜨리면서 공중전화 부스에서 돌아오고 있을 때였다. 대합실로 한 노파가 도어를 힘겹게 밀치면서 들어왔다. 노파는 거동이 매우 불편해 보였다. 다리를 절룩거리고 있었고 허리는 구부정했다. 대합실로 들어선 노파는 초조한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순간, 소녀는 분명히 이 노파가 자신을 찾는 할머니일 거라고 생각했다. 무려 세 시간만의 기다림의 끝이었다. 대합실로 들어선 노파가 할머니라고 생각하자 소녀의 두 눈에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여행용 가방을 공중전화 부스에 놓아둔 채 노파에게 달려갔다.


"할머니이!”


노파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한 소녀에게 눈길을 던졌다.


노파는 멀리서 소리치며 달려오는 소녀의 얼굴을 게슴츠레 뜬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어 가까이 온 소녀의 얼굴을 보더니 노파는 나무등걸같이 거칠거칠한 손으로 소녀의 손을 힘껏 그러쥐었다.


"네가 바로 소희여? 우리 손주년 소희?”


노파의 말에 소희는 눈물지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이구 이 녀석, 니가, 니가 바로 우리 손주년이로구먼! 어이구 내 새끼!”


노파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소희의 얼굴이 닳도록 매만지고 있었다.


낯선 일본에서의 할머니와의 처음 만남이었다. 소희는 할머니를 만나게 된 것이 너무나 기뻤다. 할머니와 생전 처음 만나게 돈 소희는 공중전화 부스 옆에 놓아두었던 여행용 가방을 끌고 왔다. 노파가 무거운 가방을 들려고 했지만 소녀는 애써 자신이 가지고 가겠노라고 했다. 거동도 불편한데 짐까지 맡길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노파와 소녀는 두 손을 꼭 쥐고 대합실을 빠져나왔다. 어느새 날은 어둑해져 있었다.


구부정한 허리에 거동까지 불편한 할머니를 보자 소희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형편없는 몸을 하고도 동행인 없이 혼자서 공항까지 나왔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아버지가 할머니 혼자 계신다고 하긴 했지만 정말 할머니는 이곳에 친척 하나 없이 혼자 사신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다시금 깊어졌다. 어떻게 아버지는 이렇게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이렇게 지금까지 나 몰라라 할 수 있었단 말인가!


공항 리무진 버스는 도쿄로 향하고 있었다.


소희는 리무진 버스 안에서 차창을 통해 빠르게 밀려나가는 나리타공항 근처의 마을의 모습을 내다보고 있었다. 차들이 오가는 적국(敵國)의 도로들은 마치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고 산들은 한국의 야산들만큼이나 야트막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십 여분 가량 버스가 달려가는 동안 넓은 평야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노파는 소희의 손을 꼭 잡고 있다가 어느 새 잠들어 있었다. 할머니와 아버지의 관계에 대해서는 차차 알게 되겠지? 소희는 할머니의 집에 도착하게 되면 노파에게 아버지와의 결별 이유에 대해서 물어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 시간 삼십 분 가까이 쉴 새 없이 달려간 끝에 리무진 버스가 최종적으로 정차 한 곳은 이케부쿠로(池袋)A호텔 앞이었다. 거기서 하차한 두 사람은 버스 운전사가 꺼내준 여행용 가방을 끌고 호텔 앞에 서 있었다. 노파와 소희를 보고 호텔 앞으로 택시가 한 대 쏜살같이 미끄러져 멈추어 서며 운전기사가 내리면서 호텔 앞의 짐을 무작정 실으려고 했다.


"이야이야!”


하고 놀란 듯 손을 가로 저으면서 그가 실으려는 짐을 다시 뺐었다. 그리고 꽤 여행용 가방을 억척스럽게 질질 끌며 버스정류소까지 절룩거리면서 앞서 가는 것이었다. 소희는 택시 운전사에게 무안한 마음에 고개를 연신 숙여야 했고 노파를 따라갔다. 노파는 뒤따라오는 소희에게 ‘타까이카라네(비싸니까)!’ 하고 방금 택시를 잡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말했다.


노파가 사는 집은 A호텔 근처에서 두 번씩이나 버스를 갈아타고 걸어서 십 여분은 가야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노파의 집을 찾으려면 미로 같은 골목길을 몇 굽이나 돌아가야 했다. 만일 소희 혼자 노파의 집을 찾으라고 했다면 틀림없이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는 그런 길이기도 했다.


노파의 집은 무척 낡은 구식 가옥이었고 한 평 반 남짓한 다다미방에 부엌이 함께 붙어있는 초라한 방이었다. 방문을 열면 곧바로 다다미방이 나왔고 부엌은 그 맞은 편 벽 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왼편으로 큰 창문이 하나 있었는데 일어서면 허리께 정도 높이에 창문이 위치하고 있었다.


노파는 소희의 짐을 방안으로 한꺼번에 밀어 넣었다. 그 모습에서 그녀는 자신의 할머니가 무척 억척스럽게 살아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 어여 들어 오니라. 어여!”


노파는 대충 자리를 정리한 후에 소희를 방안으로 들였다. 그리고 다시 나뭇등걸같이 거친 손으로


"이게 꿈이여 생시여 응? 우리 손녀딸 소희가 요로코롬 커부렀으니! 어이구 내 새끼!”


하지만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노파의 손바닥이 너무 거칠어서 소희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말았다. 할머니는 한참 동안 소희의 얼굴과 손을 어루만지다가 얼른 밥을 챙겨오겠다며 일어섰다. 맞은편에 있는 부엌에서 아니, 딱히 부엌이라고 할 것도 없는 부엌에서 부지런히 밥을 챙기고 있었다. 소희는 구부정하게 선 채로 밥그릇을 꺼내고 있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할머니 제가 할 게요. 쉬세요.”


"아녀아녀, 꼼짝 말고 있어. 나가 밥 금시 챙기줄팅께!”


할 수 없이 소희는 다시 방바닥에 앉으면서 방안을 둘러보았다. 소희의 눈에 들어온 할머니의 세간 살림은 형편없었다. 한국에서 그녀의 집안이 넉넉한 편이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 정도로 궁핍하게 살진 않았는데 마치 할머니의 방은 잠만 자는 방인 듯 아니면 부랑자들의 처소처럼 생각이 될 정도로 궁색함이 잔뜩 베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방에서는 퀴퀴한 노린내와 구린내가 함께 섞여서 풍겨오고 있었고 대충 벗어놓은 옷가지들이 벽에 걸려있기도 했다. 방을 둘러보다가 액자로 된 초상화가 소희의 눈에 띄었다. 할아버지……? 소희는 무릎걸음으로 다다미 방을 쓸어가며 방 한 귀퉁이에 놓여 있는 할아버지의 초상화를 들여다보았다. 아버지와 너무 닮았다! 그것이 소희가 초상화를 본 첫 느낌이었다. 그리고 다시 소희는 아버진 왜 날 버렸을까, 하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제는 소희가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고 단정 짓게 되었다. 난 버림받았어. 세상에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또 있을까?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소녀는 뒤로 물러나 오른쪽 벽에 허리를 기대고 무릎을 가슴에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 무릎 위에 턱을 올리고선 눈을 깜박거리면서 정면을 응시했다. 정면엔 창문이 있었다. 그 창문 틈으로 노랗고 희미한 불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할머니가 기거하는 이곳은 조용한 곳인 듯하다. 하긴, 몇 번이나 골목길을 접어들었던가. 자연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는 곳이리라. 밖에서 가끔 자전거가 지나다니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쬐끔만 더 기둘리거라잉! 싸게 밥이 될 팅께.”


노파가 조그마한 솥을 가스레인지 위에 얹은 다음 힘에 붙였던지 허리를 두어 번 톡톡 두드리면서 소희가 앉아 있는 바로 앞에 앉았다. 노파는 손녀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그려져 있다는 것을 알고는 안됐다는 듯이 소희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우리 귀허디 귀헌 손주가 왜 요로코롬 화가 나부렀다냐? 아무 걱정 말어. 처음엔 폭폭혀도 지내다 보믄 괜찮을팅께……”


노파는 일어나서 백열등을 켜고 다시 앉았다. 순식간에 어둠침침한 방안이 환해졌다. 그리고 그 불빛은 방금 전까지 조그마한 창 틈으로 노랗게 새어들던 불빛을 퇴색시켜버렸다. 소희는 갑자기 켜진 백열등 불빛이 너무 눈이 부신 나머지 이맛살을 구겼다.


"불빛이 하도 침침혀서 어저께사 전굴 갈아 끼웠더니만 대낮 같구먼.”


노파가 두 눈을 찡그리는 손녀의 얼굴을 쳐다보고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다. 노파는 밥상을 차리기 전에,


"그나저나 니 애비 애미는 잘 있는지 몰겄다.”


하며 딴청을 피우듯 하면서 말했다. 소희는 그때 떳떳하게 그 말을 하지 못하는 당신이 의아했다. 자식의 근황이 궁금한 것을 말끝을 흐리고 묻는 이유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금 할머니의 말이 소희의 머릿속을 잠시 혼란에 빠뜨렸다. 당신이 한 말 중에 ‘애비’란 말은 알겠는데, ‘애미’가 뜻하는 것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계모를 말하는 것인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누구 말예요? 새엄마 말예요?”


"……?”


손녀의 반문에 노파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엄마라니?”


"진짜 엄만 벌써 돌아 가셨잖아요! 유방암으로요.”


"뭣이여? 그 그게 참말이여?”


노파는 깜짝 놀란 듯이 그렇게 되물었다.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엄만 재작년에 돌아가셨어요. 수술을 받았지만 몇 개월 채 못 살고 돌아가셨어요.”


"워따매 시상에! 아니 시상에 그런 일이 있었구마잉……!”


"아니 그럼 할머니는 여태 그것도 모르고 계셨단 말이에요?”


소녀의 물음에 노파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에그, 못난 자석……아무리 지 애미가 원망시러버도 글치 아 그런 일이 진작에 있었다믄 애미헌티 알려줘야 쓸 것이제. 쯧쯧쯧쯧……”


식사가 끝나고 난 후 소희는 노파 곁에서 잠들었다. 소희는 생전 처음으로 친할머니와 나란히 자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희는 잠든 지 다섯 시간 만에 잠에서 깨고야 말았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무슨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왔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 소리가 꿈속에서 들었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잠에서 깬 소희의 귓전에는 분명 어딘 가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니 그 소리는 아주 흐리고 자그마한 소리였다. 아무래도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노랗게 불빛이 새어드는 창문 쪽인 듯 했다.


소희는 노파의 잠이 깨지 않게 조심하면서 엉금엉금 어둠 속을 기어가서 가만히 창문을 열어보았다. 그러자 휘잉, 하고 싸늘한 냉기가 그녀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창문 바로 밑에 야트막한 화단이 있었다. 그러나 그 화단에는 화초는 없고 잡초만 무성했다. 화단 바로 앞에는 또 다른 집들이 있었는데 매우 가까운 거리에 집들이 위치하고 있었다. 소희는 창 밖으로 상체를 기울여 주위를 살펴보았다.


"야아옹…… 야아옹……”


"이런, 난 또 뭐라고…….”


팔을 뻗으면 간신히 닿을 만한 곳에 눈이 동그란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추운지 몸을 떨며 잔뜩 웅크린 채 처량하게 울고 있었다. 소희가 허리를 숙여 새끼 고양이를 잡으려 하자, 새끼 고양이가 야옹 소리를 내지르고 등허리를 쭈뼛 세우면서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


"후훗, 요 녀석! 그런다고 내가 못 잡을 줄 아니?”


마침 새끼 고양이 뒤에는 곰팡이가 잔뜩 피어오른 벽이 있어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소희는 웃으면서 다시 새끼 고양이를 잡기 위해 팔을 뻗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새끼 고양이가 몸을 잔뜩 웅크리며 앞발로 소희의 손을 탁탁 쳐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소희는 단번에 새끼 고양이의 등줄기를 잡아 들어올렸다.


"소용없댔잖니? 어쭈, 이 녀석 제법 귀엽게 생겼는데?”


소희가 새끼 고양이의 목 주위를 손가락으로 간질이며 말했다. 새끼 고양이는 평범한 고양이 같았다. 몸 전체는 하얀 털이 나 있고 군데군데 검은 털이 나 있는 점박이 고양이었다. 아직 새끼라서 그런지 고양이의 털은 솜털처럼 부드러웠다. 소희는 새끼 고양이의 머리에 뺨을 비벼댔다. 그때 노파가 잠에서 깼는지,


"잠 안자고 뭐하냐?”


하고 물었다.


"고양이 울음소리 때문에 잠이 깼어요 할머니. 그리구 이것 좀 보세요, 이 새끼 고양이를요. 너무 귀여워요.”


소희는 방금 잡은 새끼 고양이를 노파에게 보여줬다.


"에그, 얼른 내 보내! 고양이는 영물잉께, 영물……”


"영물……요?”


"그려. 나가 미신을 꼭 믿는 사람은 아녀도 사실 우리 집안허구 짐승허군 안 맞단 말이시. 생전에 니 할아버지도 고양이 괴기를 잘 못 먹었다가 집안이 풍비박산난 적이 있으니께 말여. 글고 그 놈 보니께 요 앞 집 사는 이시이 선상님이 키우는 고양이 겉은디 날 새믄 싸게 돌려보내. 알긌냐?”


영물은 뭐고, 할아버지가 고양이 고기를 먹고 난 다음에 집안이 망했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인가. 소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할머니에게 마지못해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손녀에게 그렇게 일러두고 돌아누워 잠을 청하던 노파가 갑자기 뭐가 퍼뜩 생각이 났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안 되긌다. 고 녀석이 혹시 내뺄지도 모르니께 끈으로 묶어놔야 쓰겄다.”


그러면서 노파는 새끼 고양이의 목을 끈으로 죈 후에 종이 상자 속에 담았다.


", 싸게 자거라. 다 되았으니께.”


노파는 옷을 툴툴 털면서 다시 자리에 누웠다. 소희는 종이 상자 속의 고양이를 한참동안이나 들여다보다가 자리에 누웠다. 새끼 고양이는 그날 밤 내내 울어댔다.


이튿날 아침에 소희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할머니가 그릇을 씻는 소리였다.


"뭐 하세요, 할머니?”


"푹 잤냐? 시방 난 일하러 가야 허니께 끼니 챙기묵을란다.”


"일이라뇨?”


노파는 도쿄 타워 근처의 한 빌딩에서 청소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려. 여섯 시나 되믄 들어올팅께 넘 멀리 나가진 말어라. 글고 나가 돌아올 땐 군입거릴 사 올팅께. 아 참, 글고 고양이 새끼는 이시이 선상님헌티 꼭 돌려주고.”


그러면서 노파는 소희에게 열쇠를 맡겨놓고 일터로 갔다. 노파가 일하러 가는 것을 보고 돌아온 소희는 상자 속을 들여다보았다.


밤새 울어대던 새끼 고양이는 네발을 몸뚱이 속에 감추고 자고 있었다. 상자를 열자 새끼 고양이가 깜짝 놀란 듯이 고개를 쳐들며 야아옹, 하고 울었다. 그리고는 혀를 내밀어 앞발을 연신 핥다가 머리를 문질러 대기도 했다.


상자 속에서 새끼 고양이를 꺼내보니 고양이의 배가 홀쭉하다.


"네 주인님이 밥도 제대로 주지 않던? 왜 이렇게 말랐니? 이시이 선생? 이시이…… 훗, 참 웃기는 이름도 다 있구나.”


소희는 새끼 고양이를 품안에 안아들면서 새끼 고양이에게 마치 ‘나비야, 어서 말을 해 보려무나’ 하는 듯이 말을 걸고 있었다.


어느 새 아침 햇빛이 창틈으로 새어 들어와 다다미방 한 쪽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소희는 작은 창문을 열었다. 어둑한 밤길을 걸어 할머니 댁을 찾아와서 간밤에는 어디가 어딘지 통 알 수가 없었지만 지금은 시야가 훤히 트여서 할머니의 집 주위의 모든 것들을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저만치 삼사 미터 앞으로 붉은 눈깔이 또렷한 덩치 큰 검은 까마귀가 마치 오리처럼 걷고 있었다. 그렇게 큰 까마귀를 본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흉측해…….”


근처에는 까마귀들이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날아갔다가 다시 내려오기를 반복하는 까마귀들은 손가락으로 미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싸악 싸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희는 소리가 난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왼쪽으로 단층의 회색 가옥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낯선 남자와 아이가 큰 빗자루와 작은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있었다. 어른은 작달막한 키에 머리에는 머릿수건을 동여맸고 신발은 일본의 전통적인 신발인 게다를 신고 있었다. 그가 또각또각 한 걸음씩 옮기며 집 앞마당을 쓸고 있었다. 그리고 겨우 예닐곱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는 앞니가 입 밖으로 톡 불거져 나와 히죽히죽 웃는 모습이 꼭 무슨 만화영화의 주인공 같았다.


한참동안 소희는 그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가 창문에 선 소희를 보았는지 뜨악한 눈길로 보면서 서 있었다. 아이가 그러고 있을 때 어른이 아이의 발밑을 청소하다가 비키라는 듯이 아이의 몸을 약하게 밀었으나 가만히 있자 아이를 바라보았고, 곧 아이의 시선을 쫓아 소희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는 소희를 발견하고 잠시 동안 밀랍처럼 굳어진 채 서 있었다.


소희는 두 사람이 나란히 자신을 바라보자 당황되어 창문을 닫고는 창틈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았다. 몇 십 초가 지난 후에야 어른이 아이에게 허리를 반쯤 숙이면서 아이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소곤거리고 있었다.


소희는 닫은 창문에 등을 기대고 무릎을 세우고 앉은 채 새끼 고양이를 품안에 안고 있었다. 소희의 가슴과 맞닿은 새끼 고양이의 가슴이 벌렁벌렁 뛰고 있었다.


소희가 할머니가 말한 이시이 선생 집을 찾아간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남짓 지난 후였다. 이시이 선생의 집은 바로 맞은 편 집이었다. 이층으로 된 그의 집은 아담했고 아기자기한 분재(盆栽)가 정원에 가득한 집이었다.


하지만 소희는 그 집 문을 두드리자마자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소희는 일본어를 할 줄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그냥 돌아갈까 하고 발길을 돌리려는데 한 남자가 그곳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소희는 깜짝 놀란 듯이 그를 보았고 금세 얼굴은 붉게 상기됐다. 마치 남의 집 물건을 훔치다가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소희는 발걸음을 떼려했지만 뭔가를 강하게 접착시켜놓은 듯이 발이 잘 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소희를 흘낏 쳐다볼 때 그의 시선과 잠시 마주쳤다.


집밖으로 나온 그는 턱밑에만 수염을 V자로 길렀는데 참으로 특이한 모양의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얼굴은 찐빵처럼 부풀어 있어서 턱수염과는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다래(누구)……”


그가 소희에게 짧게 물었다. 소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의 뒤를 보니 한 여인이 집안 마루에서 어딘 가로 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기모노 차림에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얀 여자였다.


소희는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무슨 말이건 해 봤댔자 통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품에 안고 있던 새끼 고양이를 아무 말 없이 그에게 내밀었다.


"에엥?”


그가 영문을 몰라 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곧 이상한 눈으로 소희를 바라보며 손을 가로 저었다. 소희는 다시 말없이 그에게 새끼 고양이를 내밀었다. 새끼 고양이가 허공중에서 발버둥 쳤다. 그가 거듭 새끼 고양이를 보며 손을 가로젓자 소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쩌면 이 집은 할머니가 말한 그 이시이 선생이란 사람의 집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시이…… 이시이……”


소희는 다른 말은 못하고 그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자 그제야 그가 눈을 번쩍 뜨면서 ‘오토오상(아버지)?’ 하고 소희를 보고 말했다.


"좃도맛테네(잠깐 기다려보렴).”


이해 못할 말을 던지고는 그는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오토오상! 오토오상! 하고 그가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소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가 나이가 지긋한 노인과 함께 나오고 있었다. 노인의 옷차림 역시 기모노차림이었다. 노인의 얼굴은 젊은 남자와는 달리 호리호리한 편이었고 오른쪽 뺨에는 붉은 반점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는데 거기서 흰 수염이 몇 가닥 길게 나 있어 그 역시 특이한 얼굴 생김새라고 소희는 생각했다.


소희는 이번에는 노인에게 새끼 고양이를 내밀었다. 눈을 똑바로 뜨고 그를 응시하면서 새끼 고양이를 내밀자, 그가 새끼 고양이와 소희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고개를 가만히 가로 저었다. 새끼 고양이는 그가 기르는 게 아니란 뜻이었다.


소희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난감했다. 할머니는 분명 이 새끼 고양이가 이시이 선생의 것이라 했고, 지금 자기 앞에 그 이시이 선생이란 자가 서 있건만 정작 당사자인 이시이 선생은 새끼 고양이를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소희는 입을 삐죽 내밀다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의 두 눈은 실망에 찬 눈빛이었다. 그때 노인이,


"료오코 할머니 집에서 왔니?”


하고 물었다. 그가 물은 말은 일본말이 아닌 분명 똑똑한 발음의 한국말이었다.


소희는 눈을 크게 뜨고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오호, 네가 바로 료오코 할머니의 손녀로구나. 맞니? 료오코 할머니의 손녀가 너니?”


"네…….”


소희의 대답에 이시이 선생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시이 선생의 선조는 임진왜란 말기(末期)에 일본이 노예로 끌고 갔던 조선인 출신이었다. 또한 이시이 선생은 대학에서 사학(史學)을 전공했고 따로 대학시절부터 한국어를 익혀온 탓에 한국인과 의사소통을 하는데 큰 지장이 없을 만큼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네 할머니가 며칠 전에 네가 온다는 말을 했었단다. 우리 아들놈과 료오코 할머니랑 널 배웅 나갈까 했었는데 마침 급한 볼일이 생겨서 할머니 혼자 배웅을 가셨지 뭐냐. 아무튼 그건 그렇다 치고 자, 어서 들어오려무나.”


이시이 선생의 집은 그다지 크진 않았지만 집안 곳곳이 잘 정돈 되어 있어서 정갈한 느낌을 주었다.


집안에 들어서자 다다미로 된 방들이 있었는데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방문을 모두 열어놓아서 그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거실을 따라 들어가니 아까 보았던 기모노차림의 여자가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을 들여다보며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거실 가운데 정원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소희를 안내한 이시이 선생은 소희를 자부동에 앉게 한 후에 가족 모두를 나오게 해서 소희에게 가족들 소개를 먼저 했다. 그는 V자 턱수염을 기른 사람이 아들이라고 했고 화장대 앞에 앉아 있던 여자는 며느리라고 했다. 말하자면 그녀는 V자 턱수염의 아내였던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미애(美愛)라고 했다. 그녀는 소희를 보고 ‘키레이네혼토니(예쁘군 정말)!’하고 소희의 아름다운 용모에 감탄한 듯이 말했다. 미애는 목선이 아름답고 기모노가 잘 어울리는 여자였지만 왠지 도발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겉으로는 처음 본 소희를 칭찬하는 듯이 말했지만 흘낏 보는 그녀의 눈빛은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았다.


이시이 선생이 미애에게 차를 내오게 했다. 시아버지의 말에 주방으로 가서 차를 달여 온 그녀는 기모노 자락을 한 손으로 쓸어 무릎을 꿇고 앉으면서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소희를 쏘아보듯 했다. 몇 분 지났을 때 미애가 따로 내려놓은 작은 도자기 용기에 차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꽤나 격식을 갖춘 대접이어서 소희는 굳이 이 사람들이 이럴 필요가 있냐는 생각을 했다. 찻잔에서 향기한 풀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이시이 선생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치면서 소희에게 차 마시기를 권했다. 그리고 소희가 안고 있는 고양이를 보더니 그는 새끼 고양이는 잠시 며느리에게 맡겨두라고 했다. 소희가 망설이다가 미애에게 새끼 고양이를 건넬 때 새끼 고양이가 소희와 헤어지기 싫다는 듯이 발톱으로 소희의 옷을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곧 소희의 옷의 실밥이 몇 줄 뜯겨지는 소리와 함께 새끼 고양이는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미애는 새끼 고양이를 안고서 주방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시이 선생과는 비록 첫 대면이지만 왠지 모르게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차 맛이 어떠니? 마실 만하니?”


영 밋밋한 맛이고 무슨 맛인지 느끼기 힘들었다. 그러나 소희는 예의 상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냐, 아직 넌 어리니까 입맛에 맞지 않을 지도 몰라. 하지만 맛있다고 하니 예의를 차릴 줄 아는구나.”


마치 방금 품었던 소희의 속마음을 한 눈에 꿰뚫어보는 듯 한 그의 말투였다. 사실 지금 마시고 있는 차 이름이 무엇인지 그녀가 알 리 없고, 또 입안에 깔깔하게 달라붙는 것 같은 차 맛을 제대로 느끼기란 힘들 것이다. 차를 오랫동안 다루어왔고 혀끝으로 음미할 줄 아는 사람들이 차 맛을 제대로 알까. 소희는 차 맛을 제대로 느낄 수는 없었으나 콧속으로 은은히 풍겨오는 냄새는 향기롭다고 생각했다.


"지금 마시고 있는 차는 머리가 맑아지는 작설차란 것이다. 일본에선 귀한 손님이 오면 차를 대접하는 것이 예의란다. 그리고 이 차는 다름 아닌 바로 너희 할머님이 내게 선물한 것이기도 하고.”


그가 찻잔을 정성스럽게 손에 받쳐 들면서 그렇게 부연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그와 할머니 사이는 꽤 각별한 것처럼 보인다. 할머니도 이시이 선생의 얘기를 할 때는 무척 오랫동안 사귀어온 지인(知人)이라는 것을 은연중 느낄 수 있었다. 소희는 찻잔 모서리에 입술을 살짝 대고 차를 마시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이시이 선생도 소희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소희는 그의 시선과 마주치자 슬그머니 외면했다.


"넌 참 영리하게 생겼구나. 그리고 어디 하나 죽은 데 없는 얼굴이고, 헌데……"


그러면서 이시이 선생은 뱉은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소희는 그를 쳐다보았다. ‘헌데’ 하는 말 뒤에 무슨 얘긴가가 나올 것 같았는데 그는 더 이상은 말을 잇지 않았다.


그가 말끝을 흐린 이유는 소희의 눈빛에서 소희가 범상치 않은 눈빛을 지니고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소희의 눈빛은 뭐라고 한 마디로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눈빛이었던 것이다. 평소에 군더더기의 말을 잘 꺼내지 않는 그였기에 그 순간 그는 무척이나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소희의 눈빛에서 강한 기()가 발산되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우울한 비련미가 느껴지는 그런 눈빛이라고 그는 느꼈다.


이시이 선생에게서 뜨끈한 작설차를 한 잔 얻어 마신 소희는 아침 식사를 안 했으면 함께 식사를 하자는 그의 제안을 사양하고 새끼 고양이를 품안에 꼭 껴안고 그의 집에서 나왔다.


집으로 돌아온 소희는 새끼 고양이를 소중하게 품안에 안고 방구석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새끼 고양이의 이름을 지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이시이 선생집 고양이라고 했으나 정작 그는 이 새끼 고양이의 주인이 아니었다. 다행이라 싶었다. 이제부터 자신이 기르면 되겠구나, 생각하며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네 이름을 지어줄게. 뭐로 지어줄까? 음……”


소희는 한참동안 새끼 고양이에게 어떤 이름이 적당할지 궁리를 거듭했다.


"그래, 키키, 키키가 좋겠다! 어떠니? 키키란 이름이 마음에 드니?”


그러자 새끼 고양이가 마치 대답이라도 하는 듯이 야아옹, 하고 고개를 치켜들며 울었다.


"호호, 그래. 네 이름은 이제부터 키키야. 알겠지?”


다시 새끼 고양이가 야아옹, 하고 울었다.


소희는 새끼 고양이가 키키란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한 것 같아 흡족해서 키키의 목덜미를 간질이다가 종이 상자 속에 집어넣었다.


"졸려서 잠 좀 잘 거야. 알았지?”


소희는 키키의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면서 말하고 나서 팔베개를 하고 드러누웠다.


왼팔을 머리 밑에 베개 삼아 기대고 허리를 모로 세워 잠을 청하려던 소희의 뇌리 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아까 이시이 선생 집에서 자신을 가끔씩 흘겨보던 미애의 눈빛이 떠올랐다. 겉으로는 손님으로서 그녀를 무척 반기는 듯 했지만 흘겨보던 그 눈빛은 꼭 그런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은 무시하는 듯 한 눈길이었다. 그녀가 어떤 연유로 그런 눈빛을 던졌을까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자신이 한국에서 왔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소희는 한국에 있을 때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일본이 한국에 몹쓸 짓을 많이 한 나라이기에 소희 스스로도 일본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호의로운 것은 아니었다.


소희는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런데 밖에서 미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소희는 몸을 발딱 일으켜 창가로 다가가서 이시이 선생 집 앞을 몰래 바라보았다. 때마침 미애는 V자 턱수염을 기른 남편과 함께 외출을 하려는지 밖으로 나와 두 사람이 타면 비좁을 것 같은 경승용차에 오르고 있었다. 경승용차는 곧 비좁은 골목길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하며 어딘 가로 사라져버렸다.


그것을 본 후 소희는 창문을 닫았다.


처음 와 본 일본……


소희는 아직 여기 일본이란 나라가 어떻게 생겨먹은 나라인지 몰랐다. 집 밖으로 나가보자는 생각에 그녀는 키키를 품안에 안고 집밖으로 나갔다.


몇 개의 골목길을 빠져 나오는 동안 소희는 과연 이곳이 일본의 중심도시인 도쿄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주위에 들어선 주택들이 형편없이 낡고 작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서울의 대부분의 주택가들의 절반도 채 안 되는 크기의 주택들이 즐비했다.


소희는 이곳저곳을 눈여겨보면서 집 근처에 위치한 공원을 찾았다.


집 근처 공원은 그다지 크진 않았다. 공원 둘레엔 철 구조물의 펜스가 설치되어 있었고 시민들을 위한 철봉이나 그네, 벤치 같은 것이 띄엄띄엄 위치 해 있었다. 그네는 모두 세 개가 하늘을 가로지른 듯 한 쇠기둥 아래로 내려와 있었는데, 그 중 그네 한 개는 망가져 있었다. 그리고 공원 안에는 검은 까마귀들이 몰려다니고 있었다. 소희는 검은 까마귀들을 보자 흉물스러워서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래서 소희는 까마귀 떼가 몰려다니지 않는 나무 벤치에 엉덩이를 뭉그대며 앉았다. 소희는 나무벤치에 표정 없는 얼굴로 앉아 공원을 찾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공원을 찾은 사람의 대부분은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이다.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소희는 키키의 목에 묶은 줄 끝을 손가락으로 말아 쥔 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키키는 땅바닥에 네발을 딛자마자 약간 허둥대는 모습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을 보다가 소희는 공원의 오른 쪽 펜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거기엔 자전거들이 잔뜩 늘어서 있었다. 근처 기둥에 노란 형광색의 자전거 주차 표시가 있는 걸로 봐서 아마도 그곳이 자전거를 세워두는 장소인 듯 했다. 자전거들은 모두 핸들 앞이나 뒷바퀴 바로 위에 철제 바구니를 달아놓은 것이 특이했다. 한국에서는 자전거에 그런 구차한 철제 바구니를 달고 다니지 않기에 소희의 눈에는 그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세일러복의 학생들이 자전거 잠금 장치를 풀어 어디론가 달려가곤 했다. 소희의 나이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학생들을 보자 그녀는 부러운 듯이 그들을 바라보아야 했다.


자전거를 타는 학생들 중에는 여학생을 뒤에 태우고 가는 남학생들이 더러 있었다. 하얀 와이셔츠에 회색 교복바지를 입은 남학생이 흰 블라우스에 체크무늬의 주름치마를 입은 세일러복의 여학생의 가방을 받아 철제 바구니 속에 엇비스듬하게 놓은 후에 여학생이 탈 때를 기다려 자전거를 몰고 갔다. 신나게 페달을 밟고 가는 남학생의 허리를 단단히 잡으면서 허리를 곧게 펴고 있는 여학생의 모습은 마치 소희에게 묘기를 보여주는 듯 했다. 자전거의 속도도 그리 만만치가 않건만…….


소희는 이번에는 자전거가 늘어선 곳의 반대쪽 공원 안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검은 까마귀들이 운집해 있었다. 검은 까마귀들이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는 오물을 헤치며 열심히 먹이를 쪼고 있었다. 검은 까마귀들이 예외 없이 덩치가 크고 더러워서 소희는 인상을 잔뜩 찌푸려야 했다.


소희가 호기심 어린 눈길로 이곳저곳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자신의 손가락이 바짝 조여드는 느낌이 들어 앞을 밑을 보니 키키가 뒤로 물러났다가 앞으로 폴짝 뛰어들며 열심히 장난을 치고 있었다.


소희는 벤치에서 일어나 키키에게 다가가서 앉았다.


"하하, 요 녀석!”


키키가 개미집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개미집 안으로 개미들이 기어들고 나가고 있었다. 소희는 잠시 키키의 재롱을 지켜보다가 개미집을 향해 폴짝 뛰어드는 키키를 품안에 안고 일어났다. 아직은 아무도 없는 빈집에 들어가고 싶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생소한 도시를 싸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만일 그랬다가는 금방 길을 잃고 말 것이다. 소희는 밝은 아침에 어울리지 않는 침울한 표정으로 집을 향해 한 걸음씩 발걸음을 옮겨가고 있었다.


소희가 일본 땅에 발을 내딛은 지 어느새 3년여 세월이 지나갔다. 그동안 소희는 스무 살의 어엿한 숙녀가 되어 있었고 단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던 일본어를 여느 일본인들 못지않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소희가 그렇게 된 데는 이시이 선생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 그는 소희에게 일본어에 대해 체계적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소희에게 일본에서의 생활이나 문화에 대해서도 친절한 가정교사 노릇을 했다. 또 한 가지 그가 소희에게 베푼 것이 있다면 그것은 소희가 원하는 배우수업을 받게끔 1년 전부터 이케부쿠로에 위치한 연기전문학원에 다니게 해 주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기실 그것은 그가 탐탁지 않게 생각한 부분이었고 내심 배우가 되겠노라고 했을 때 그런 화려한 길을 걷는 것이 얼마나 불안한 일인가를 직시하고 충고와 조언으로 다른 길로 들어섰음 하는 바람이었으나 소희의 의욕을 쉽사리 꺾을 수는 없었다.


"제가 용돈을 벌어서라도 꼭 가고 말거예요!”


소희는 입을 앙다물고 그렇게 되뇌곤 했다.


그래서 어떤 날은 왜 굳이 배우가 되려느냐. 하고 묻기도 했는데 그때 소희는 꼭 그러고 싶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세상 모든 사람들 앞에서 찬미와 찬사를 받으면서 살고 싶다는 강한 의욕을 밝혔다. 그녀의 의지는 강했고 그 말을 할 때 그녀의 눈빛은 쇳덩어리라도 녹여 없앨 듯 했다. 이시이 선생은 소희의 할머니와 여러 번 그 문제를 상의하곤 했다. 소희의 할머니가 이시이 선생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 그녀는 무척 놀라는 눈치였다. 그것은 소희의 할머니 역시 일찌감치 소희가 결코 평범한 여자가 되지 못할 거라곤 예감했고―우연의 일치인지 소희의 할머니도 손녀의 인생이 결코 순탄한 운명이 아닐 거라고 예감하고 있었다―적극적으로 소희가 다른 길로 장래 문제를 선택해 주길 바라면서 번번이 소희를 설득하곤 했다. 그러나 설득 끝의 결론은 그녀의 포부를 차마 꺾을 수 없다는 쪽이었다.


결국 소희의 뜻대로 소희가 열아홉 되던 봄에 이케부쿠로의 한 연기전문학원에 수강시키게 되었다. 소희는 연기전문학원에서 배우수업을 받는 것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표정 연기를 할 때 그녀는 그 어떤 배우가 이만큼 생동감 있는 연기를 할까, 그 어떤 배우가 이만큼 희로애락을 표현할 수 있을까 하고 나르시시즘에 빠져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미모 역시 정말이지 흠잡을 데 하나 없이 빼어나다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자랑스러워하게 된 것이다. 화장을 조금이라도 곁들이면 꽃의 향기는 더해졌고 거울 앞에서 눈을 부릅뜨면 가시 많은 장미가 되곤 했다. 그래서 연기전문학원에서 소희가 연기를 하다가 누가 불러서 그런 눈빛으로 되돌아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뭇등걸처럼 뻣뻣이 경직되곤 했다. 그리고 빙긋 웃어주면 사람들은 그제야 휴우, 하고 안도하는 한숨을 내쉬며 용건을 말할 정도였다.


그렇게 신나는 연기수업을 받고 돌아오던 날 소희의 할머니가 그 동안의 지병이 악화되어 몸져눕게 되었다. 의사가 왕진을 다녀가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 저었다.


"한 달을 채 넘기시기 힘들 것 같습니다.”


진찰을 마친 의사의 말은 소희에게도 이시이 선생에게도 꽤 충격적인 것이었다. 소희에게는 그 동안 낯선 일본 땅에서 혈육이라곤 할머니 밖에 없었는데 당신께서 돌아가신다는 사실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소희는 훌쩍이고 있었다.


"쉬려무나.”


이시이 선생 역시 의사의 말에 힘없는 말투로 그렇게 한마디 나지막이 내뱉고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소희는 이시이 선생의 그러한 행동이 분명 할머니와 쌓아온 정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이시이 선생 역시 나이든 자로서 얼마 안 있으면 닥치게 될 죽음을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보름 정도 지났을 때 이시이는 며느리를 불렀다. 그는 소희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거기 좀 앉거라.”


시아버지의 부름에 쪼르르 자기 방에서 나온 미애는 무슨 일인가, 궁금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쓱 쳐다보았다.


"왜요 아버님?”


그녀가 단정히 자리를 깔고 앉으면서 묻자, 이시이는 정원 쪽을 보던 시선을 그녀에게 돌렸다.


"너도 소식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만 소희가 이번에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한다는 구나.”


"네 네에? 정말이에요?”


미애가 깜짝 놀란 듯이 떠듬거리면서 되물었다.


이시이는 그렇다는 듯이 대답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설마……”


미애는 차마 믿어지지 않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잠시 후에 미애가 그다지 밝지만은 않은 얼굴로 다다미 결을 따라 시선을 던졌다. 미애는 소희가 온 후로 시아버지가 유달리 소희에게 애착을 보이자 나름대로 소희에게 불만이 있어온 터였다. 그리고 연기전문학원의 일만도 그랬다. 학원비가 수십만엔 씩 하는데 그걸 아낌없이 치르고 있었고, 항상 소희, 소희 하고 말하는 것이 정말이지 배가 아팠다. 더구나 소희의 아름다운 미모 역시 그녀에겐 질투가 날 정도였다.


이시이가 며느리에게 물어보려는 것은 며느리의 직업이 소희의 이번 일과 결코 무관하지 않아서였다. 미애는 무대 제작 전문 업체의 톱디자이너로 있었다. 도쿄의 한 전문학원에서 무대디자인을 전공한 그녀는 미국에서 설치미술과 무대디자인을 배웠고 지금은 그쪽 계통에선 꽤 알아주는 실력파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시이는 일찌감치 며느리가 그쪽 계통에 일을 하고 있기에 자기보다 먼저 그 소문을 접하고 있을 거라고 단정 지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닌 듯했다.


"하지만 아버님……”


"하지만 뭐냐?”


"네…… 그게 좀……”


"……?”


미애가 뜸을 들이면서 말했다.


"제가 알기로는 이미 배역이 정해진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그럼 소희가 나온다는 말은……?”


"아뇨, 제가 알기론 소희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거든요. 또 한국여자를 그런 큰 무대에 서게 할 리는 없고……”


"그건 그렇다마는…… 혹시 그럼 소희가 일본 이름으로 출연하는 건 아닐까? 가만, 거기 학원원장은 뭘 좀 알고 있겠지. 아가, 내 서재 위에 수첩을 좀 가져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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